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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칼럼] 송경호 전문연구원 - 어버이날,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다


아침부터 첫째 아이를 혼냈다. 어버이날 감사편지를 읽는 부모의 모습을 촬영해야 하는 숙제가 있었다며, 잠옷도 갈아입지 못한 엄마를 들들 볶기에 그만 ‘버럭’ 해버렸다. 아이는 울먹이며 학교에 갔고 나는 화낼 일이 아니었다며 자책하고 있다. 양가 부모님께는 용돈을 보냈다. 감사편지는 카톡으로 대체됐지만, 어버이날은 내게도 숙제다. 어버이라는 말 자체가 낯선 요즘, “어버이의 은혜에 감사하고, 어른과 노인을 공경하는 경로효친의 전통적 미덕을 기리는 날”(<한국민족문화대백과>)이란 설명은 시대에 뒤처진 느낌이다. 낳기만 해서는 부모가 아니고, 나의 불행은 부모가 잘못 키운 탓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오기에 어버이는커녕 ‘맘충’이나 ‘한남’ 취급당하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지경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가족과 부모는 전제군주, 국가와 시장 못지않게 억압적인 존재로 볼 수 있다. 가부장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이의 자유로운 의사에 반하는 규범과 규율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가족과 부모는 필연적으로 그런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침에 내가 그랬듯이.


하지만 우리가 자유주의에 기초해 가족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이상하다. 가족에 대한 강한 긍정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돌 그룹과 래퍼는 돈 벌어서 부모님 호강시켜주겠다고 노래하고, 웹툰과 웹 소설에서 행복한 결말은 해체된 가족을 복원하거나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것으로 설정된다.


장경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제시한 ‘가족 자유주의’는 이런 일견 모순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가족 자유주의는 자유주의를 사회 핵심가치로 채택하면서도 자유와 책임의 기본 단위를 개인이 아닌 가족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서구 자유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여기서 가족은 “더러는 배타적이기까지 한 책임, 권리, 자유의 정치적·경제적 단위”이자 “거시적 혼란이나 위기에 직접적이고 긴밀하게 반응하는 주체”로 이해된다.


2018년 6월 <지식의 지평>에 기고한 ‘가족 자유주의, 위험가족, 인구 위기: 21세기 한국 사회의 딜레마’에서 그는 한국인들이 “한편으로 가족(자유)주의적 대응을 강화해 나갔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 가족(관계)에 대한 일종의 자체적 ‘구조 조정’을 단행하거나 아예 가족(관계) 형성 자체를 유보하거나 포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가족관계가 사회적 자원으로 작용할 가능성 못지않게 사회적 위험을 전달할 가능성이 커지는 현실”에 대한 “상황적 합리성”이 반영된 결과다.


간단히 말해, 한국인들은 지금까지 가족 단위로 똘똘 뭉쳐서 위기 상황을 극복해 왔지만, 요즘 상황에서는 금수저가 아니라면 차라리 가족이 없는 게 낫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에 따라 그는 “가족 자유주의 정치·경제와 사회정책 체계를 총체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치와 제도를 변화시켜 “경제·사회적 가족 중심성”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 자유주의에서 가족을 떼어내고 그냥 자유주의로 만들면 문제가 해결될까? 한국의 가족(자유)주의는 상황적 구성물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아닐까? 자유주의 사회는 가족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 여전히 남는다.


최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오갤)>에서 보듯, 소위 서구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가족은 중요한 가치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가족이 배타적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적·경제적 단위가 아니라 ‘일상의 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공동체)’이라는 사전적 의미에 가깝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가족의 의미다. 어버이날이 ‘어버이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이 아니라, 가족으로 함께 일상의 생활을 공유할 수 있어서 감사한 날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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