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포커스-봉영식] 김정은의 연말 스트레스
2018년 마지막 달이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께서 얇은 습자지 종이 달력을 매일 아침 한 장씩 뜯어내시면, 그걸 만화 그림 위에 대놓고 비치는 선 따라 그렸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어른들은 “너무 숨 가쁘게 살지 말고 달력 넘어가는 소리 좀 듣자”는 덕담을 서로 주고받았다. 종이 달력보다는 스마트폰으로 날짜를 보는 시대이지만, 그래도 연말인지라 김장은 끝냈느냐, 송년회 날짜를 일찍 정하자는 소리가 주위에서 들린다. 북한은 광복 70주년인 2015년 8월 15일을 기해 대한민국 표준시보다 30분 늦은 ‘평양시’ 사용을 선포한 바 있다. 그러나 평양 표준시간을 사용하게 되면서 북한 정부와 주민이 큰 불편을 겪게 되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평화의집 접견실에 시계가 2개가 걸려 있었는데, 하나는 서울 시간 다른 하나는 평양 시간을 가리키고 있어 이를 보니 매우 가슴이 아팠다. 북과 남의 시간부터 먼저 통일하자”고 말하고, “이건 같은 표준시를 쓰던 우리 측이 바꾼 것이니 우리가 원래대로 돌아가겠다”고 ‘선심’을 표했다. 그리고 평양시간은 2018년 5월 5일 0시를 기준으로 대한민국 표준시와 다시 같아졌다. 또한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출생연도를 원년으로 하는 ‘주체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중요합의문을 보면 북한 정부대표가 ‘주체 00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 위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미국 본토 전역이 우리 핵 타격 사정권 안에 있으며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는 것을 미국은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70돌이자 남조선이 겨울철 올림픽 경기대회를 개최하는 2018년을 남북관계 개선의 사변적인 해로 빛내겠다고 선포했다. 그 김 위원장에게도 2018년은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올해 상반기는 그래도 북한이 원했던 대로 남북관계와 북·미 협상이 진행됐다.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이 평창올림픽에 참가했고, 남북은 5개월 동안 세 번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역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그 이후 한반도 정세는 북한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북한의 원래 바람대로라면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기념일이나 광복절에 한반도 종전선언이 있고, 김 위원장이 9월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면서 북한은 명실공히 정상국가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았어야 한다. 북·미 국교정상화도 벌써 궤도에 올라 있어야 하고, 숨통을 짓누르는 경제제재도 상당부분 해제됐어야 한다. 그러나 북·미 대화는 공전을 거듭하고 있고, 김정은·트럼프 2차 정상회담도 내년 초 개최라는 원칙상 합의에 머물러 있다. 문재인정부는 김 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을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미 정상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담 중 가진 30분의 비공개 회담에서 북한 비핵화가 실현되기 전까지 강력한 대북제재 이행의 중요성에 동의했다는 소식은 김 위원장에게 서울 답방을 주저하게 만든다. 미국과 등을 돌리더라도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대북 경제제재 해제를 결정하고 남북 경제협력사업을 본격적으로 가동한다고 약속한다면 모를까, 절실히 바라는 대북 경제제재 해제의 보장 없이 분단 후 최초의 북한 최고지도자 서울 방문이라는 흥행 카드를 북한 정권이 그냥 쉽게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이 평양시간을 실험하고 주체연호를 사용하더라도 가는 세월을 늦추지 못하고 지난 세월을 돌이킬 수 없다. 한 달 내에 서울 답방도 결정해야 하고 2019년 신년사에 담길 내용도 정해야 하는 김 위원장이 올해 마지막 달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않을까 싶다.
봉영식 연세대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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