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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칼럼] 문정인 특임연구원 - 판문점 선언, 핵심은 북의 태도다

최종 수정일: 2020년 8월 4일

판문점 선언, 핵심은 북의 태도다

남과 북은 한반도의 전쟁 상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가 회담의 의미를 짚었다.

분단, 전쟁, 비극. 오랜 시간 판문점은 그 모든 뼈아픈 역사의 살아 있는 상징이었다. 바로 그곳에서의 12시간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평화의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판문점 선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엄숙히 천명한다.” 지난 한 해 우리가 감내해야 했던 극심한 위기감과 전쟁의 공포를 생각하면, 선언문에 담긴 ‘새로운 시대’는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 초현실적 서사에 가깝다.

ⓒ영상:2018 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 4월27일 남북 정상회담 환영 만찬에 참석한 문정인 교수(맨 오른쪽)

‘평화, 새로운 시작’이라는 슬로건이 말해주듯, 이제 남과 북은 한반도의 전쟁 상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다. 이번 정상회담은 2000년, 2007년 1, 2차 정상회담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난 두 정상회담에 특별 수행원으로 참석했던 필자에게는 이번 정상회담이 내용과 형식 면에서 훨씬 돋보인다. 남북관계 발전, 군사적 긴장 완화, 신뢰 구축과 군축, 한반도의 평화 체제와 비핵화에 이르기까지, 합의 내용과 실천 의지, 이행 시간의 압축성 등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판문점 선언의 곳곳에서 묻어난다.

가장 먼저 눈이 가는 것은 의제 설정에서의 합치성이다. 과거 대화 사례를 돌이켜보건대 남북은 으레 어떤 주제를 논의할 것이냐를 두고 소모적인 샅바 싸움을 벌여야 했다. 구체적인 의제를 주장하는 서울과 원론적·포괄적 의제를 주장하는 평양, 남측의 기능주의적 접근과 북측의 정치군사적 접근 사이 간극은 크고 깊었다. 그러나 판문점 선언은 그 모든 거리를 극복하고 전쟁 종식과 평화 체제, 비핵화 같은 핵심 의제에서 간명한 합의를 이뤘다. 이전과는 명확히 다른 모습이다.

사실 이번 정상회담이 내걸었던 목표는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보일 만큼 담대하고 파격적이었다. 70년 가까이 묵은 전쟁을, 그것도 올해 안에 종식시키고 새로운 평화의 역사를 만들겠다는 대목이 특히 그랬다. 그러나 이를 현실화할 수 있다는 두 정상의 의지는 상상을 초월했다.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해서만은 점진적인 혹은 중장기적인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던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이라 할 만했다.


ⓒ한국 공동사진기자단

4월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선언을 낭독한 후 퇴장하고 있다.

회담과 판문점 선언문에서 눈여겨볼 대목 세간의 적지 않은 이들이 비판하는 ‘완전한 비핵화’ 부분도 실은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 본인이 누차 밝혔듯 이번 회담의 핵심 의제는 누가 뭐래도 북한의 비핵화다. 다만 이 문제를 다루는 북한의 최근 행보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최근까지 평양은 ‘핵 문제는 오로지 미국과 북한 사이의 문제이므로 남측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 본인이 ‘완전한 비핵화를 통한 핵무기 없는 한반도의 구현’을 서면으로 확인해주었고, <노동신문> 역시 이 문장을 가감 없이 보도해 기정사실화했다. 더욱이 파격적인 부분은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통해 완전한 비핵화의 구체적 행보를 가시화했다는 점이다. 특히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5월 중 미국과 한국의 전문가 및 기자들을 초청해 공개적으로 폐쇄하겠다”라고 밝혔다는 점이 그렇다.

이번 회담에 임하는 김 위원장의 정책적 행보는 충분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비핵화의 전제조건으로 주한 미군 철수나 축소, 한·미 동맹의 지위를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와 대화해보면 내가 남쪽이나 태평양상, 그리고 미국을 겨냥해 핵무기를 쏠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미국과 자주 대화해 신뢰를 쌓고 종전 선언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면 왜 우리가 핵을 가지고 어렵게 살겠느냐” 같은 발언이 그 자리를 메웠다. 뒤집어 말해, 남측이 바라는 대로 올해 안에 종전 선언이 이뤄지고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된다면, 북측도 그에 상응하는 비핵화 노력을 하겠다는 것이다. 역시 전례 없이 고무적이다.

마지막으로 눈여겨볼 부분은, 양국 정상이 과거의 합의와 선언을 이행하지 못했던 원인이 무엇인지 충분히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 정상은 판문점 선언이 단순한 합의로 끝나지 않도록 만들겠다는 성실한 이행 의지를 약속했다. 특히 김 위원장이 이를 더 강조했다는 사실은 북측의 합의 불이행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파격이 아닐 수 없다. 5월 고위급회담, 장성급 군사회담, 적십자회담, 8월15일 이산가족 상봉, 문재인 대통령의 올가을 평양 방문 등 앞으로 이어질 주요 회담과 행사 일정을 선언문에 명기한 것 역시 이행 의지를 한층 단단히 못 박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는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 이전부터 오랫동안 간직해온 목표다. 이번 정상회담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역사적 발판을 만들어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일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평화로운 한반도로 향하는 길 위에는 숱한 제약과 도전이 숨어 있다. 이 냉엄한 현실을 한결같이 인식할 때라야 최종 목적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동안 신중하고 끈기 있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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