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대화파'인 로버트 갈루치 전 미국 북핵 대사가 16일 한국이 북한과 핵무기가 아닌 어떤 주제로라도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 정부에도 북한과의 조건 없는 고위급 회담을 주문했다.
갈루치 전 대사는 이날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연세대 통일연구원 초청 강연에서 "한국은 북한에 손을 뻗었지만 북한이 아직 준비돼 있지 않았고 미국은 북한이 일종의 진실성을 담보해야한다는 대화 전제 조건을 달았다"며 이렇게 밝혔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오전 갈루치 전 대사를 청와대로 초청해 약 1시간 동안 면담하며 남북관계에 대한 자문을 받았다. 이에 따라 갈루치 전 대사가 문 대통령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견을 전했을지 관심이 쏠렸다.
갈루치 전 대사는 강연에서 "경제적이라든지 한국만이 북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며 "한국은 북한과 어느 주제에 대해서든 대화를 시작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미국 행정부에는 "북한과 적어도 차관보나 국무장관급 고위급회담을 전제조건 없이 시작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한반도 비핵화가 북한과 협상의 최종 목적인데 북한은 핵을 굉장히 가치 있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협상이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면서도 "협상의 가장 어려운 목적은 신뢰를 높이면서 점진적으로 성취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탄도미사일 시험을 제한하는 동시에 한미연합훈련을 제한한다든가 주고받을 수도 있다"며 "협상을 하면서 휴전협상을 평화협상으로 교체하는 것들을 계속 진행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갈루치 전 대사는 "어떤 합의이든 나오기만 한다면 그것이 더 낫다"는 의견을 밝혔다. 1994년 제네바 합의와 관련해 "북한이 파키스탄에서 원심분리 기술을 가져오는 등 속임수를 썼다고 볼 수도 있다"며 "하지만 북한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미국이 평양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지 않고 악의 축이라고 명명한 데 따른 합리적인 반응"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2년 조지 워싱턴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이 찬물을 끼얹지 않았나 생각한다"며 제네바 합의 자체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북한에 대한 불신을 근거로 협상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의견을 내놓은 것이다.
다만 갈루치 전 대사는 북한에 대한 제재에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북한에 평창동계올림픽 참여를 제안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며 "강경한 제재를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저는 제재 자체가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지 제재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이 이미 핵무기 기술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제재를 한다고 해도 핵 프로그램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북한이 협상에 나올 수 있게 하는 제재는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노력을 통해 이란과 결국 성공적인 협상을 했다"고 덧붙였다.
또 "봉쇄정책은 핵 프로그램을 봉쇄할 수 없지만 위협을 봉쇄할 수는 있다"며 "재래식 무기라든가 탄도미사일 방어체계를 배치해 무기를 억제하는 것은 좋은 옵션이 될 수 있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갈루치 전 대사는 1993년 미국 측 수석대표로 북한과 협상,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 낸 '북미 제네바 합의의 주역'으로 불린다. 제1차 걸프전 이후 이라크의 무장 해제를 감독하기 위해 조직된 유엔 특별 위원회 의장직과 미 국무부 정치군사업무국의 차관보직을 역임했다.
미 국무부 순회대사 및 특사로서 탄도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WMD) 확산에 따른 위협에 대처한 21년간의 공직생활 후 조지타운대학의 외교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현재 조지타운대학 외교통상학 특임교수를 맡고 있다.
이날 강연에는 갈루치 전 대사와 친분이 있는 문정인 청와대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 겸 연세대 명예교수도 참석했다. 문 특보는 원래 갈루치 전 대사와의 토론자로 참여할 예정이었지만 갈루치 전 대사를 향한 청중 질문이 쏟아지자 토론 시간을 양보했다.
© News1 박지혜 기자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