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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호] 김승영 방문교수 - 19세기말 열강의 세력경쟁과 조선중립화 논의: 미중경쟁기에 다시 보는 역사와 교훈

2월 5일 업데이트됨

제105호(2017/11)


김 승 영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방문교수)


19세기말 열강의 세력경쟁과 조선중립화 논의: 미중경쟁기에 다시 보는 역사와 교훈



북한의 핵능력이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외교는 사드 배치문제 등을 둘 러싸고 계속돼온 미중갈등의 구도 속에 좌표 찾기에 고심해왔다. 그런데 조금 긴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최근 미중간의 경쟁도 19세기말 이후 양상을 바꿔가며 지속 돼온 주변 강대국간 세력경쟁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강대국들 사이 의 경쟁이 극명하게 드러났던 시기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개전이전의 약 10년 동 안의 전환기들이었다. 역사적 사건들은 그대로 반복돼 재현되지는 않지만, 오늘의 상황과 정세를 파악하는 데 적지 않은 참고의 재료를 제공한다. 본 이슈브리프는 최근 국내외 역사가들의 연구 성과들을 참고해, 청일전쟁이전 약 10년간 벌어졌던 외교경쟁을 중심으로 당시의 동북아 외교사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9세기말 이전까지 조선의 대중관계는,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 제질서 안에서 중국의 패권을 자발적으로 인정하는 틀 안에서 내정에서의 자주성을 유지 할 수 있는 체제였다. 그러나 청은 19세기 말이 되면서 그 같은 비교적 비 간 섭적인 체제를 넘어서, 조선의 대외정책을 지도, 통제하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서세동점과 함께 서구식 국제법체제가 동아시아에도 도입되는 가운 데, 청은 근대 국제법의 틀과 외교양식에 근거해 공식적으로 조선을 종속국가로 규정해 속국화하 려는 노력을 계속했던 것이다. 당시 청나라는 그동안 주변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해 주던 베트남, 티벳 등의 지역들이 급속히 프랑스, 영국의 세력권으로 편입되고, 러 시아와도 국경분쟁이 일게 되자, 조선에 대한 통제의 강화가 자국의 안보에 사활적 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던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이후 일본의 정치, 경제적인 영향 력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자 청나라의 외교를 주도하던 리훙장은, 급증하 는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방책으로 조미수교를 주선해, 서구각국들이 조선과 수교하는 문을 열어준다. 조선에서 열강들 사이에 세력균형이 형성되게 함으로써, 일본 영향력을 견제하는 이이제이 방식의 외교전략을 조선에 적용한 것이다. 그러는 한편, 청은 조선이 근대적 외교관계를 수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집요하게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인정받게끔 강요하는 조치를 취해 나갔다. 1882년 조미수교당시 조 미간 수호조약에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명기하는 속방조항을 넣으려 고집했고, 이후 1887년 조선이 최초로 미국에 외교사절을 파견할 당시, 박정양 초대공사가 국무 부를 방문하기 전후로 워싱턴주재 청국공사관을 들러서 사전 사후 보고를 하도록 강요하려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일본의 위협뿐 아니라 국내변란에 대응하는 데도 청국의 군사적 개 입이 필요했던 조선의 조정은 청나라의 통제를 떨쳐 버릴 방법이 없었다. 임오군란 (1882)과 갑신정변(1884)이 신속하고 압도적인 청군의 출동으로 진압됐을 뿐 아니 라, 오히려 청국의 군사적 보호아래 민란 등 왕권에 대한 도전을 막아내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종은 청나라의 간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러 시아에 접근한다. 고종이 가장 기대를 했던 나라는 미국이었지만, 워싱턴 당국이 주 변강국들 사이에 치열한 세력경쟁이 일고 있던 조선에서의 외교, 군사 문제에서는 일체 간여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확고히 지켜나갔다. 그래서 고종은 계속 조선 문제 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끌어 들이기 위해 은밀한 외교노력을 기울이게 됐다. 일본의 침투와 간섭도 두려웠지만, 청나라의 간섭역시 집요함을 더해가는 상황에서, 러시아를 견제세력으로 유인하려는 비밀외교를 추진한 것이었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외교고문으로 활동했던 독일인 묄뢴도르프는 고종의 지지아래 한편으로는 러시아가 조선을 보호해 줄 지 여부를 러시아측에 타진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당국은 1885년 4월 영국함대가 거문도를 점령하는 사태가 벌 어지기 이전까지는 자칫 군사적 분쟁에 말려드는 단초가 될 수 있는 조선의 정치, 군사적 개입에 비교적 조심스런 대응을 보였다.

한편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일본정부와 신문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아직 청 나라와 군사적으로 대적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는 군사적 현실 등을 고려해, 주 변 강대국 등을 포함한 국제적 보장을 통해 조선을 중립화 시키는 방안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거론됐다. 임오군란 수습에 참여했던 일본 법제국의 이노우에 코와시의 건의가 그것으로, 일본, 영국, 청, 독일, 미국 등 5대국이 보장해 조선의 중립화를 실현하자는 방책이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정부와 내각은 이노우에가 건의한 조선 중립화 건의를 국가 정책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조만간 일본의 영향을 받은 급진개 화파들이 쿠데타 등을 통해 조선의 개혁을 주도할 것이란 기대가 작용한 탓으로 분 석되고 있다.

일본당국의 내밀한 기대처럼, 1884년 12월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 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유혈 쿠데타가 3일천하로 끝나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은 조선에서 청일공동 관리체재를 선호해 가게 된다. 다음해 4월 18일 톈진에서 청일 양국간안 체결된 천진조약이 그 합의였다. 일본의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 文)와 청의 직예총독 리훙장(李鴻章)이 천진에서 만나, 일단 청일 양국 군대를 조선 에서 철수하고, 조선에 군사교관을 파견하지 않으며, 향후 조선에서 변란이 일어나 군대를 파견하게 될 경우 상호 통보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천진조약이 체결될 즈음에는 이미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영국 간의 경쟁이 일고 있었다. 갑신정변의 충격을 겪은 고종이 일,청 양국을 견제하는 한 방책으로 조러밀약 체결을 추진하면서 러시아에 영흥만 조차를 허용하려던 동향 을 보이자, 이를 파악한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차단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 거한다. 청일양국이 천진조약을 체결된 지 두 주일만에 일어난 급변사태였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등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맞서고 있던 대영제국 은 러시아가 한반도 해안에서 부동항을 확보해 중국해안까지 지배하는 사태를 막으 려 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비교적 조심스런 자세를 유지해 왔던 러시아도 오 히려 더 적극적으로 조러밀약을 추진하는 등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위한 경쟁 에 나서가 된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일본에게도 큰 충격으로 작용했다. 당시 영국과 불평 등 조약 개정 작업에 임하던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 해서는 조약개정에 부정적 영향을 줄인다는 측면과, 러시아 남진을 차단한다는 효 과 등을 고려해 비판을 자제한다. 그런 한편으로 러시아의 세력 확대를 차단하기 위해 청국의 리훙장에게 비밀리에 조선의 행정과 외교를 공동관리 하자는 방안을 제의한다. 바로 1885년6월에 제시된 ‘조선변법 8개조’라는 제의였다. 이 제안에서 이노우에는 친러 정책을 주도하고 있던 고종의 내정 및 외교문제에 대한 간여를 차 단하고, 대신 유능한 조선 관료를 통해 조선의 정무를 관리자고 제의했다. 사실상 조선을 청일 양국의 공동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구상이었다. 동시에 러시아 세력을 유인하려한 묄뢴도로프를 해임, 미국인 고문으로 교체하고, 무엇보다도 조선의 주요 정무를 리훙장과 자신간의 극비협의를 통해서 진행하자고 제의한다. 외견상으로는 조선에 대한 청의 우월한 영향력을 인정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청일간 비밀협의를 통해, 조선의 외교를 통제하려 한 구상이었다. 이 구상은 청나라의 거절로 실현되지 는 않았지만, 청일 공동관리를 통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침투를 막으려 했던 일 본의 전략이 보이는 구상이었다.

한편 영국의 거문도 점거사태로 충격을 받은 조선정부는 묄뢴도로프의 주도 아래 보다 한동안 적극적으로 조선의 중립화를 검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중 립화 구상은 별 추진력을 얻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조선에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청나라의 리훙장이 거부의사를 표명한 데다, 조정의 중신들 역시 오히려 중국의 보호아래 안주하기를 선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구파 고관들 가운데는 ‘청나라가 다 책임져 주고 조선의 절대왕조체제를 지지해주고 있는 데, 굳이 자주외 교를 할 필요가 없다’는 논지를 전개한 인사들이 적지 않았고, 무엇보다 청이 조선 의 중립안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과 조선지도층들은 인식은, 유길 준 등 개화파 선각자들마저도 중립안을 구상하면서도, 일단 청국의 주도하는 중화 중심적 질서라는 큰 틀은 수용하면서 그 틀 안에서 중립성을 보장받는 방안 속에 안주하려 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청일전쟁이전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군사, 정치, 문화적 헤게모니가 여전히 강력히 작용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청일전쟁 개전 4년 전인 1890년 4월 일본정부안에서 조선중립화의 가능성 을 잠시 검토되기는 했으나,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메이지유신 의 주역이자 일본 육군의 대부였던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제출한 외교정략 의 견서에 조선중립화에 대한 분석이 포함된 것이다. 야마가타는 이전부터 조선은 일 본의 이익선 안에 포함된다며,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해 위협적인 세력이 조선에 배 타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던 원로였다. 야마가 타의 의견서는 두 가지 조건을 조선중립화 실현의 전제로 하고 있었다. 먼저 조선 이 대외정책으로 중립을 유지할 확고한 정치적 결의가 있어야 하며, 또 주변열강도 모두 조선의 중립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이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었 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그런 전제조건들이 충족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야마 가타는 결론 내렸다.

이런 가운데 일본정부안에서는 본격적으로 먼저 청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조 선에서 축출해나간다는 강경노선이 자리 잡아 가게 된다. 이 단계에서 주목해야 할 변화는, 1890년대로 들어가면서 임오군란당시 청군에 밀려난 이후 일본이 본격적으 로 시작했던 군사력증강이 육해군 양면에서 모두 청국과의 결전에서 승리가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실현돼 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정부안의 논의 과정에서는 여 전히 청과의 타협을 통해 전쟁을 피하자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원로 정치인들의 의견과, 청과의 개전을 통해 조선을 일본의 세력권 안으로 확보하 고, 청나라보다 더 위험한 러시아세력의 침투 등을 차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게 된다. 당시 주전론은 오랜 유학과 해외근무 경험 등으로 구미정세에 밝았던 아오 키 슈조, 무츠 무네미츠 등 외무대신들이 나서서 주장했으며, 이들은 청과의 전쟁을 통한 조선장악론 밀어붙이게 된다.

그러던 중 1894년 봄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혁명군의 거병하자, 이를 진압하 기 위해 조선의 조정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일본당국이 천진조약에 따 라 파병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게 된 것이다. 주전론을 주도하던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의 주도로 일본정부는 개전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호전적 인 일본 내 여론의 압력도 일본정부가 개전을 결정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동 학군은 외세 개입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1894년 5월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 고, 청나라 역시 개전을 주저했다. 하지만, 이미 주전론이 대세를 이루게 된 일본정 부는 대규모 군대를 파병, 청과의 개전을 택했던 것이다. 전쟁은 일본의 대승으로 막을 내리고,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사실상 조선의 장악을 의미하는 ‘조선 의 독립’을 청국으로 보장받게 되고, 대만을 식민지로 확보했다. 당시 일본은 요동 반도까지 세력권으로 확보했으나, 러시아가 주도한 3국 간섭으로 일본은 요동반도 는 청에게 반환하게 된다.

결국 청일전쟁 이전의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 경쟁의 양상을 요약해 보자면, 일본과 청 양국이 모두 군사적 대비태세와 역량만 확보되면, 조선에서 자국의 영향 력을 공세적으로 확대해 나가려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군사적 대비 등 의 측면에서 준비가 덜 된 러시아의 경우, 외교적인 방책으로 타국에 비해 영향력 이 실추되는 상황을 방지하는 선에 머물면서, 군사적 개입을 피하면서 영향력을 확 보하려는 자세를 유지했다. 일본의 경우, 한때 조선 중립화를 검토했으나, 갑신정변 당시처럼 친일 개화세력을 통한 조선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선호했다. 거문도 사건 을 전후해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하자, 강한 경계심을 표시하면서, ‘청-일공동 관 리’방식으로 조선에 대한 러시아세력의 침투를 방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다가 군사적 준비태세가 이뤄지자, 청과의 개전을 통해 청나라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조선을 일본의 세력권 안에 장악하려 한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에서의 친일적 개혁실현과 영향력 확대를 추진했으며, 청일 개전 직전에는 조선 중립화를 적극적으로 실현시키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한편 당시 고종은 외교고문 묄뢴도로프와 함께 중립화 가능성을 몇 차례 모색은 하였으나, 이를 확고한 외교전략으로 수립해 일관성 있게 추진하지 않은 것으 로 보인다. 조정내부나 개화파 선각자들 사이에서도 중립화를 추진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히 자리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청국의 압도적 영향력 아래 대외정 책상의 자율성에 한계를 느끼면서도, 고종과 조선당국은 이이제이적인 방식으로 열 강들 사이의 균세를 형성시키려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절대적인 국력의 취 약함으로 인해 불안정해 보이는 외교곡예를 해가며 근근이 상황을 관리하는 양상이 계속되다, 청일간의 개전으로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는 상황을 맡게 됐다.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 및 중립화 가능성 등을 놓고 벌어진 열강들 사이 의 세력경쟁은 러일전쟁직전에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경쟁에서 다시 나타나게 된 다. 청나라의 세력이 제거된 이후 러일간 세력경쟁이 가열되는 가운데 대한제국은 몇 차례 중립화외교를 추진했고, 러시아도 1900년 이후 미국을 조선중립화를 보장 하는 주요국가로 지정하며 중립화실현을 모색했다. 그러나 일본은 1902년 초 영일 동맹 체결을 전후해 러시아와의 대결노선을 추구하면서 조선중립화를 반대했다. 특 히 영일동맹을 체결할 무렵부터는 한반도 전체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확보를 향후 러시아와의 협상에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라고 정하고 나섰다. 러시아도 1899년에는 마산포를 유사시 해군기지로 확보하기 위해 일본과의 토지매입 경쟁을 시작했으며, 이후 궁정과 정부안에 강경파들이 득세 하면서 1903년 봄부터 조선북 부지역을 장악하려는 강경노선을 취해갔다.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벌목기지로 만 든다는 구실로 점거해 사실상 군사요새화하려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일본정부는 용암포 사태를 위기상황으로 간주하고, 협상을 통해 해결점을 찾지 못할 경우, 개전을 불사한다는 내부방침을 정한다. 이후 1903년 8월부터 반년 동안 계속된 러일간 외교협상은 한반도 및 남만주지역에 설치할 비무장지대의 범위 를 놓고 벌인 전형적인 세력경쟁이었다. 한 마디로 일본 측은 압록강 강변의 남,북 50km씩 지역에 각각 비무장 지대를 설치하자고 제의한 데 비해, 러시아는 북위 39 도선 이북의 한반도 북부지역 전체를 비무장 지대로 정하자고 맡선 것이다. 러시아 측의 답신 정보가 지연되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러시아 측의 군사적 준비태세가 강화된다고 우려한 주전론이 정부 내 협의와 여론에서 대세를 이루게 됐고, 결국 1904년 2월 8일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됐던 것이다.

러일 간의 외교경쟁이 벌어지던 당시 미국은 고종과 조선 내 친미개화파들 의 많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조선 문제에 대해 불간여 입장을 유지했다. 호레이스 알랜주한 공사 등 한성주재 미국 외교관들은 조선의 독립이나 고종의 중립화외교 등에 지지의사를 비치기도 했으나, 씨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과 워싱턴 외교당국은 조선에서의 일체 정치, 군사적 문제에서는 불개입 정책을 유지한다는 원칙을 고수 했던 것이다. 2차대전 당시와는 달리, 동아시아에서 해군력 등의 면에서 여러 열강 들 가운데 한나라에 불과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해 줄 수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사활적 전략적 이해가 걸려있지 않던 조선에서의 정치 적 문제에는 불간여 정책을 유지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의 대응은 미국의 국력이 쇠퇴해가거나 극도의 방위비 압력에 봉착할 경우, 21세기의 미국도 고려할 수 있는 전략이라는 면에서 정책적 시사를 주기도 한다.

21세기 오늘의 시점에서 중국은 세계 2위의 강국으로 부상해 국력 쇠퇴기 에 있던 청나라와는 크게 다르다. 하지만, 지정학적 현실에서 연유하는 한반도에 대 한 중국의 민감성은, 최근 사드문제에 대한 대응에서 볼 수 있듯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특히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한국이나 베트남 등 주변 국가들에 대한 외교에 서, 사실상 중국이 패권 종주국으로 군림하던 전통적인 동아시아적 조공체제와 유 사한 압도적인 방식을 적용하려 하고 있다는 분석이 서구학계에서 제기돼 오고 있 다. 21세기 현재 미중간의 날선 경쟁이 재현되고 있는 가운데, 구한말 당시 한반도 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청일 및 러일 간의 세력경쟁은, 한반도를 둘러싼 해양세력과 대륙세력간의 경쟁의 단적인 예라는 면에서, 오늘의 한국외교가 처한 상황과 대응 방안 등에 대해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 하고 있다.

물론 한국의 국력과 주변국들의 국력상황, 그리고 무기체계 등이 워낙 달라 진 현실이라, 구한말의 사례가 제시할 수 있는 정책상의 교훈에는 한계가 있다. 하 지만, 전반적으로 당시의 외교사를 개관해 보면,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을 방지하려 면, 주변강국들이 모두 한반도나 주변지역에서 일방적으로 상호배타적인 영향력 증 대만을 추진하기보다, 상호 전략적 자제(moderation)를 염두에 두어야 함을 볼 수 있다. 동시에 한국 역시 동맹관리나 외교노선의 선택 등에서 대단히 신중한 접근을 해야 하며, 지도자들의 안이한 인식이나 국내 시민사회의 분위기가 국가의 운명을 좌우 할 수 있는 논의들을 지배하는 상황을 방지해야 함을 구한말 외교사는 교훈으 로 일깨워 주고 있다. 그리고 주변 강국들 간의 비밀논의가 진행돼 한반도의 운명 을 결정하는 상황의 재연을 막으려면, 외교적 노력뿐 아니라, 국가재원을 피폐시키 지 않는 범위 안에서 국방, 외교, 경제의 세 가지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독자 적으로 국력에 맞는 군사적 역할과 전략입안능력을 확보해가는 일이 긴요함을 보여 준다. 구한말 당시 워싱턴 당국이 일본의 조선강점을 지지하면서 ‘조선은 내정의 혼 란으로 도대체 자국의 방어를 위해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는 나라’는 비관적 평가 를 근거로 삼았음을 역사의 교훈으로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 되고 있는 엄중한 안보상황은, 한류붐 등으로 성가를 올려온 연성국력(소프트 파워) 뿐만 아니라, 군사, 경제력 등에 기초한 경성국력(하드파워)의 축적과 주변국가에 신뢰를 줄 수 있는 신중한 외교, 안보노선의 선택이 긴요함을 역사의 교훈에 비춰 새롭게 인식할 필요를 상기시키고 있다. l Issue Brief는 집필자의 견해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의 공식입장과는 관련 이 없습니다.















이슈브리프105호 YINKE Nov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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