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호
임 명 수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원)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 이후 남북관계 변화와 전망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대화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개최되었으나 2019년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9월 21일 문재인 대통령이 제76차 유엔 총회에서 ‘종전선언 제안’을 계기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를 계기로 지난 3년간 남북미 관계를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최근 북한의 반응 분석 및 종전선언 제안을 계기로 마련된 대화의 불씨를 살려 나가기 위한 방향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2019년 이후 지난 3년간의 남북관계 변화에 대해 개략적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no-deal)’로 끝나면서 남북, 북미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비록 2019년 6월 3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극적인 만남을 가졌지만, 반전(反轉)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였다. 2020년 들어서 북한은 탈북자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한 항의 표시로 6월 9일 남북통신연락선 차단에 이어 6월 16일에는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여 충격을 주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는 노무현 정부 이후 10년여 만에 가진 남북 정상회담의 성과물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남북관계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파국 선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북한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에 기대를 걸었지만 2021년 1월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2018년 북미대화의 동력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4월 말 바이든 행정부는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삼고 일괄타결이나 전략적 인내 어느 한쪽이 아니라, 실용적 접근(calibrated pragmatic approach)을 대북정책의 방향으로 제시하고 ‘외교’와 ‘관여(engagement)’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성 김 대북특별대표를 임명하고 북한에 ‘조건 없는 대화’를 계속 제시하고 있지만 5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북한은 대화에 응하지 않고 있다. 대신 북한은 3월과 9월 순항미사일과 탄도미사일 발사와 7월 이후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하는 등 바이든 행정부와 대화의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남북한은 지난 7월 27일 그동안 차단돼왔던 남북통신연락선을 복원하기로 발표함으로써 남북관계가 개선될 것으로 전망하였으나 후반기 한미연합지휘소훈련을 이유로 북한은 8월 10일 다시 통신연락선을 차단하였다. 경직됐던 남북관계는 지난 9월 21일 개막된 제76차 유엔 총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에 북한이 호응해오면서 변화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북한은 “종전선언을 위한 상황이 조성돼 있지 않다”며 선결 조건을 제시하고 미사일 발사를 하면서 진전이 없었다. 그 뒤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9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10월 초 남북통신연락선 복원’ 의사를 밝히고, 10월 4일 실제 복원되면서 일단 대화 통로가 마련되었으나 북한은 우리 정부의 화상회의 제의에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 남북대화 재개에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는 반응으로 읽힌다.
문재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에 대해 지금까지 북한이 요구한 선결 조건을 보면 ‘이중기준’과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로 압축된다. 먼저 ‘이중기준 철회’ 주장은 한국과 미국의 신무기개발은 안보를 위한 것이고, 북한의 핵·미사일 등 신무기개발은 ‘도발’로 규정하는 데 대한 반발이다. 이것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자위수단 강구라는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한미의 양보를 얻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는 한미연합훈련 중단과 한반도에 배치된 주한미군 전략자산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미가 합의하기에 어려운 점을 정조준하고 있다고 하겠다.
특히, 지난 9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김정은 총비서가 “새 미 행정부의 출범 이후 지난 8개월간 보여준 것을 보면 미국의 군사적 위협과 적대시 정책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으며, 역대 미 행정부들이 추구해온 적대시 정책이 연장에 불과하다”라며,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점에서 당분간 북미대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 요구에 대해 미국은 “북한에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며 “조건 없는 대화에 나설 것”을 주장하였고, 남북통신연락선 복원에 대해서도 “남북협력을 강력히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점에서 향후 미국의 태도 변화가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북한이 문재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에 반응을 보인 이유는 이 같은 미국과 대화를 통해 얻을 게 없다는 판단하에 북한 주도로 한반도 안보지형과 대화의 틀을 재편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향후 남북관계는 ‘우리 정부의 태도’ 여하에 달려있다”라고 한 것은 우리 정부에게 미국의 비핵화 정책이나 대북제재 해제 등을 유인하는 역할을 해달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가운데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10월 11일(현지시간) 미국을 방문해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만나 종전선언을 포함하여 남북, 북미 관계 전반을 점검하고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유인책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10월 10일 노동당창건 76주년을 맞아 대규모 열병식 대신 무기전시회를 갖고 최근 5년 개발한 최신 무기를 과시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는 ‘이중기준’과 ‘적대시 정책’ 철회를 재강조하고, “한미는 주적이 아니다”라며 “핵과 미사일 개발과 같은 군비증강을 자위권”이라고 정당화하였다. 이러한 김정은 총비서의 발언은 올해 1월 8차 노동당 대회 사업총화 보고에서 “미국이 최대의 주적”이라고 한 것과는 결이 다르다는 점에서 미국과 대화의 여지를 열어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최근 일련의 상황을 종합해볼 때, 북한은 일차적으로 남북 대화를 복원을 추진하되 북한이 제시한 조건을 우리 정부의 이행을 지켜보면서 속도를 조절해 나갈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은 우리 정부를 통해 미국의 대북제재와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도록 모종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중기준 철회’, 적대시 정책 수단인 ‘한미연합훈련 중 단’과 ‘주한미군 전략자산 철수’ 등에서 양보를 얻어내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렇지만, 미국은 일관되게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대북제재 해제와 같은 당근 정책을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인 기대를 하기 어려운 상 황이다.
종전선언(終戰宣言)은 말 그대로 아직 끝나지 않은 6·25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관련 당사국들이 한반도에서 항구적 평화의 토대 마련을 위한 정치적 선언을 통해 대화의 문을 열자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국제법적으로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서는 평화협정, 또는 평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 종전선언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점에서 전쟁의 종결과는 다르다. 정전협정은 군사적으로 적대행위, 즉 전쟁을 중단하기 위한 순수한 군사적 성격의 합의이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 사령관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했고, 유엔군사령관이 한국군과 유엔군을 대표하여 서명하였기 때문에 정전협정에는 한국정부가 개입할 법적 권한은 없다. 다만, 정치적 행위인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평화조약은 체결 등과 같은 정치적 행위에 대해서는 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한반도에서 적대행위를 정지하기 위해 체결된 정전협정은 순수하게 군사적 성격의 협정이기 때문에, 한국 정전협정 제4조 60항에는 “한 단계 높은 정치회담을 통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 근거에 따라 1953년 8월 28일 국제연합은 이 조항의 구체적인 시행을 위해 ‘국제연합총회의 결의 제711호(Ⅶ)’를 채택하였다. 위 두 근거에 따라 우리 정부도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개최된 외상급 제네바 정치회담에 참석하였다는 점은 정치문제에 대해 법적 권리의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종전선언과 관련해서는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정상회담 뒤 발표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제4항에 기본적인 방향을 반영한 바 있다. 이후 2018년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 3항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 2항 등에 “종전선언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공동 노력을 해 나가기로 합의”한 바가 있다. 따라서, 북한이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에 대해 반응을 보인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북한은 최근 3년간 변화된 상황 변화를 반영하여 ‘이중기준’과 ‘적대시 정책’ 철회를 선결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점이 차이점으로 보인다. 또한, 문 대통령이 유엔 총회 참석 후 귀국 전용기 안에서 취재진과 가진 간담회에서 종전선언과 비핵화를 투트랙(two-tracks) 접근법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북한의 입장과 맞아떨어졌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기존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출발점은 미국의 대북정책 목표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선 비핵화’였다. 그러나 이번에 문 대통령의 발언은 종전선언과 평화협상, 그리고 비핵화 협상이 별개로 추진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하였다는 점이 기존 접근법과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원론적으로 종전선언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만 문 대통령의 투트랙 접근법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라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은 상황이다.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에 대해 북한이 선결 조건을 제시하였지만, 반응을 보였다는 점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남북미 간에 적대성과 비핵화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대화 테이블에 마주 앉아야 쌍방의 입장 차를 좁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출발이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점에서 우리 정부에게는 좋은 기회로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의 선결 조건에 대해 미국의 수용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고 종전선언에 대한 한미간 이견이 있는 것은 부정적인 요소로 평가된다. 지난 10월 26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종전선언의 순서, 시기, 조건 등 세 가지 요소를 특정해 한국과 이견이 있을 수 있다는 발언은 그 예이다. 비록 지난 11월 9일 이수혁 주미 대사가 특파원 간담회에서 “종전선언 문제에 대해 한미가 긴밀히 협의하고 있고, 종전선언 문안까지 의견을 교환하는 등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그 뒤 미국의 호의적인 반응은 없었다는 점에서 넘어야 할 산이 많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하지만, 대화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점에서 우리 정부의 창의적인 대북, 대미 접근을 통한 조정자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하겠다.
현재 시점에서 종전선언은 다음 세 가지가 제한요소로 작용할 전망이다. 첫째, 문재인 정부의 잔여임기가 5개월여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정권 말기 정치적 불안정 요소가 많고 실행이 불투명하다는 점에서 북한이 선뜻 정치적 합의를 꺼릴 것으로 전망된다. 둘째, 내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 정당의 변수이다. 그동안 남북관계가 집권 정당에 따라 냉·온탕을 오가는 상황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의 경직된 대북정책이다.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남북 당사자 간 정치적 신뢰회복이 필수적이다. 아울러, 남북 상호 간 정책의 지속성과 예측 가능성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5년 단임제인 우리 정치제도의 특성상 대통령에 따라 대북정책이 변화돼왔다는 점은 남북관계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당이 집권하더라도 남북관계의 원칙과 방향이 유지될 수 있도록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물론 북한이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 등과 같은 합의를 이행하지 않은 것은 북한에 귀책사유가 있다. 하지만 기존 남북합의들이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논의의 토대가 되어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동서독 통일 과정에서 ‘동서독 기본법’은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 동서독도 여러 합의를 체결하고 이행하는 데 많은 애로가 있었지만, 안정적 상황관리를 위해 새로운 대안들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동독의 변화를 유인한 바가 있다.
결론적으로, 우여곡절 끝에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 이후 북한의 호응에 이어, 지난 10월 4일 남북통신연락선 복원은 남북미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록 북한이 선결 조건을 제시하며 우리 정부에 공을 넘겼지만, 북한이 그만큼 남북 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그동안 북한은 협상 과정에서 명분을 중요시해왔다는 점에서 북한이 대화 테이블로 나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한미 간 긴밀한 협의와 정부의 건설적인 대북접근 등 조정자 역할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 Issue Brief는 집필 자의 견해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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