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호] 김명세 전문연구원 - 북중관계, 핵갈등을 넘는 혈맹 회복이 가능할까
-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공용/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 3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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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1일 전
제178호
김 명 세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원)
북중관계, 핵갈등을 넘는 혈맹 회복이 가능할까
지난 9월 3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80주기 기념식에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림이 있었다. 바로 26개국 정상들이 오른 천안문광장 망루 중심에 시진핑 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그리고 북한 지도자가 나란히 선 모습이었다. 1959년 이후 66년만에 천안문 망루에 다시 선 북중러 정상들은 ‘반서방 연대’를 과시하였다. 다음날 열린 북중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 지도자들은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양국 사이 친선의 감정은 변할 수 없으며 양국 관계를 훌륭하게 수호하고, 훌륭하게 공고히 하며, 훌륭하게 발전시킬 의지를 피력하였다. 두 달 후에 있을 경주 APEC 정상회담을 의식했는지 북한 지도자는 국제 및 지역 문제들에서 양국 사이 전략적 협조 강화와 공동 이익 수호를 언급하였다. 이로써 2019년 6월 시진핑 주석의 평양 방문 이후 코로나 펜데믹을 거치며 껄끄러워진 양국 관계가 6년만에 회복되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하지만 9월초 베이징 이벤트는 북중 사이 확실한 혈맹 회복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두 나라 관계에 치유되지 않은 커다란 암덩이를 덮어놓은 미봉에 불과했으며 언제든 다시 꺼질 수 있는 풍전등화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하는데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지난달 31일 대통령실은 경주 APEC 정상회담 기간 열리는 한중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실현 문제를 논의하기로 의제협의를 보았다고 발표하였다. 북핵 위협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상황에서 비핵화를 실현하고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한국뿐 아니라 북한과 인접한 중국의 이해관계에도 부합되는 것이기에 한중 정상이 한반도 비핵화를 논의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이 일을 두고 북한은 외무성 중국담당 부상 담화를 발표하며 즉각 반발하였다. ‘몰상식’과 ‘개꿈’이라는 그들의 전용 막말을 꺼내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한국 대통령실을 겨냥한 비난이었지만 한중이 합의한 의제를 비난했다는 점에서 합의 당사자인 중국을 향한 성토라는 지적이 가능하다. 나아가 11월 1일 한중정상회담 시작 30분 전, 서해 북부해상으로 10여발의 방사포탄을 발사하며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역시 정삼회담 일방인 중국 시진핑 주석을 향한 반발이라는 시각을 피하기 어렵다.
중국은 11월 5일 류하이싱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베이징주재 북한 대사에게 지난달 있은 당 제20기 4중전회 정신을 이례적으로 통보하면서 북한을 달랬다. 하지만 커다란 암덩이가 내재된 북중 관계는 언제든 삐걱될 수밖에 없다. 그 암덩이는 바로 북핵이다. 북핵이야 말로 오늘날 북중 관계를 6.25 혈맹관계로의 회복을 원천 불가능하게 만드는 암덩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핵무기 개발을 촉발시킨 중국의 개혁개방
잘 아는 바와 같이, 북핵의 근원은 6.25전쟁의 ‘원자탄’ 트라우마다. 공포의 ‘원자탄 바람’은 전장의 형세를 흔들었고, 그에 떠밀려 수많은 북한주민들이 월남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후 북한은 핵연구준비를 서둘러 1960년대 초 소련에서 시험용 원자로를 들여와 본격적인 핵연구에 달라붙었다. 1970년대에는 시험용 원자로 최대 출력을 두 차례나 갱신하면서 원자로 운영경험을 축적하였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1979년 5메가 원자로를 자체로 설계해 1980년 건설에 착공했고, 1986년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1979년 북한의 5메가 원자로 설계는 그간의 핵활동을 연구에서 무기 개발로 전환시킨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배경은 한해 전 1978년 12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채택된 개혁개방 정책이다. 그것은 중국이 개혁개방을 결정한지 일주일이 지난 12월 25일 노동당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책임일군협의회 연설에서 김정일이 처음으로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는 구호를 제시한데서 확인된다. 이 구호는 남의 본을 따고, 남의 뒤를 따르거나 남의 덕으로 살 것이 아니라 우리식으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김정일은 한미일의 무력증강과 군사협력 강화, 그리고 국제공산주의운동 내부의 복잡성을 구호 제시 배경으로 꼽았다. 주체 확립을 의미하는 ‘우리식 대로 살아나가자!’ 구호의 성격이 한미일과의 대적투쟁이 아닌 동일 이념상의 노선투쟁이라는 점에서 구호 제시의 진짜 배경은 후자, 즉 국제공산주의운동 내부의 복잡성이며 그것이 바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다. 결국 ‘우리식 대로 살아나가자!’ 구호는 중국의 본을 따서 개혁개방을 하거나 중국의 덕을 보지 말고 우리식 대로 혁명하자는 대중국 비판구호인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더불어 1979년 1월 1일 미중 수교에 대해 김정일은 1979년 2월 14일 인민군 군단, 사단 및 여단 정치부 선전선동부장회의에 보낸 서한에서 ‘계급적 원칙과 혁명의 이익을 저버리고 제국주의자들에게 아부 굴종하며 적들과 무원칙하게 타협하는 수정주의’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해 9월 10일 노동당 조직지도부 책임일군회의 연설에서 핵무기 개발로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발언을 하였다.
“오늘 국제정세가 매우 복잡하고 일부 사회주의나라들이 국제주의원칙을 버리고 민족이기주의로 나아가고 있는 조건에서 우리는 국방과학을 더욱 발전시켜 자체로 현대적인 무기와 전투기술기재를 더 많이 만들어내야 합니다.”(김정일, 「군수공업을 더욱 발전시킬 데 대하여」,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책임일군회의에서 한 연설 1979년 9월 10일, 『김정일선집』 제6권, 147쪽)
중국이 국제주의원칙을 버리고 민족이기주의로 나가고 있는 조건에서 북한이 자체로 개발해야 할 현대적인 무기는 단순히 개선된 재래식 전력이 아니었다. 1970년대 후반 소련을 지배주의로 인식하고 있던 북한에 있어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은 국제주의원칙에 기초한 사회주의진영의 보호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하는 청천벽력이었다. 수십년 사회주의진영의 보호를 받아왔던 북한은 이제 그 보호를 대체할 수 있는 현대적인 무기가 필요하였고, 그것은 핵무기 이외 다른 어떤 것도 대체 불가능하였다. 결국 중국의 개혁개방을 사회주의진영 보호막의 해체로 인식한 북한은 1979년 그것을 대체할 핵무기 개발을 결심하고 자체로 5메가 원자로를 설계하고 다음해 착공하며 본격적인 핵 노정을 시작했던 것이다.
김정일 시대 중국의 북핵 소극적 대처
1989년 초 프랑스 상업위성의 영변 핵단지 사진공개로 북한의 핵개발은 의혹에서 사실로 드러났다. 국제사회는 북한 핵개발의 결정적 증거가 확인된 이상 1985년 북한이 가입한 핵확산금지조약 의무 이행과 국제원자력기구의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사찰을 요구하였다.
북한이 국제사회 지탄을 받으며 외교적으로 커다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중국은 북한 핵개발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거나 저지를 위한 국제사회 흐름에 동참하지 않았다. 중국은 북한의 지정학적 중요성으로부터 국제적 압박에 동참하여 북한 체제가 붕괴되는 상황을 기본적으로 원치 않았다. 게다가 당시 천안문 사태로 국제적 고립에 빠져 있던 중국으로서는 북핵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또한 북한 핵개발이 아직은 초기 단계여서 위험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 북한 핵개발을 방관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 핵개발에 대해 중국은 직접적 비난은 자제하면서도 북한에 치명적 타격을 주는 경제적,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대표적인 것이 1991년 한국의 유엔가입을 저지해달라는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당시 한국이 유엔 가입 움직임을 보이자 다급해진 북한은 1991년 5월 중국 리펑 총리를 평양으로 초청해 유엔 안보리에서 한국의 유엔 가입에 대해 상임이사국 비토권 행사를 요청했으나 정중히 거절당했다. 결국 북한도 어쩔 수 없이 유엔 가입으로 선회함으로써 그동안 줄곧 반대해왔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상황을 맞고 말았다. 거기에 더해 중국은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전격 수교함으로써 북한에 엄청난 정치외교적 타격을 주었다. 중국이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에 참가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과 경제교류도 늘려가는데 불안해진 북한은 한중 수교 저지를 위해 1991년 10월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할 만큼 두 나라 관계정상화에 매우 민감하였다. 1990년 9월 한소 수교로 이미 큰 타격을 받은 바 있어 북한은 어떻게 하나 한중 수교만큼은 막으려고 했으나 김일성의 생애 마지막 방중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특히 중국은 1992년부터 북한과의 대외무역에서 국제시장가격에 기초한 ‘경화결제(주로 미국 달러)’를 요구하여 경각에 달하였던 북한 경제가 파산에 이르게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89년 동유럽 붕괴와 1991년 12월 소련해체로 사회주의시장이 완전히 사라진 북한에 있어 중국의 경화결제 요구는 물에 빠진 사람 꼭대기 누르는 격이 아닐 수 없었다.
중국에 있어 북한의 한국 유엔 가입 저지 요구 거절과 한중 수교, 북한과의 대외무역에서 경화결제 전환은 냉엄한 국제 현실에서 자국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선택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 중국이 사회주의를 제창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북한에 치명적 타격이 되는 그러한 선택에는 국가 이익 수호 이외의 고려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고려는 바로 북한 핵개발에 대한 중국의 불편한 심기인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지만 않았어도 북한에 치명적 타격이 되는 한국 유엔가입 묵인이나 한중수교를 강행하지 않았을 것이며, 특히 빈사에 이른 경제를 목도하면서 매정하게 경화결제 요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북중 밀당 속에 완성된 ‘핵무력 대업’
김정일 사망 이전까지 북핵에 대한 중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초기 핵개발의 여러 진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주도해서 마련한 동결 상태를 유지 관리하는 것으로 보였다. 핵무장 완성과 고도화를 막아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는 상황만큼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미국 전략자산들의 한반도 전개를 막아 북한에 더 이상 핵개발 빌미를 주지 않는 것이다. 중국은 이를 통틀어 ‘한반도비핵화 실현’으로 제창하였고, 실현 방법으로 대화와 협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2012년 북한에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중국의 기본 입장을 흔드는 사태가 벌어졌다. 2013년 2월 시진핑 주석의 취임 한 달 전, 북한은 3차 핵실험으로 중국의 신정부 출현에 먹구름을 뿌렸다. 설상가상 동결 상태를 깨는 북한의 ‘핵경제 병진노선’이 새로 들어선 시진핑 정부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했다. 그 때문인지 중국은 취임 4개월 차 박근혜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에 동의하면서도 1년 먼저 집권한 북한 지도자의 방문은 불허하였다. 북한은 최룡해 당시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특사로 파견해 박근혜 대통령보다 먼저 중국 방문을 실현하려 했지만 돌아온 건 핵개발을 하지 말라는 핀잔뿐이었다. 다음해 2014년 7월 시진핑 주석이 취임 이후 첫 한반도 방문지로 평양이 아닌 서울을 택한 것도 핵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던 북한 지도부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반영한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핵개발을 둘러싼 북한과 중국의 밀당은 2015년에도 이어졌는데, 그해 12월 10일 베이징에 도착한 모란봉악단이 준비를 마치고 12일 첫 공연을 하는 날, 돌연 방문 자체를 취소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방문 취소 이유에 대한 여러 설이 난무하지만 유력한 설은 악단이 베이징에 도착한 10일 지도자의 평천혁명사적지 참관 관련 조선중앙통신 보도 내용이 중국측의 심기를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중앙통신은 “오늘 우리 조국은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존엄을 굳건히 지킬 자위의 핵탄, 수소탄의 거대한 폭음을 울릴 수 있는 강대한 핵보유국으로 될 수 있었다”는 지도자의 발언을 소개하였다. 한반도 비핵화를 추구하는 중국의 주장과 어긋나는 이 발언에 중국 측이 첫날 공연을 관람하는 고위 간부의 격을 낮추자 북한이 공연 취소와 귀국을 전격 결정했다는 것이다. 지도자의 수소탄 발언이 공연 취소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이후 북한에서 벌어진 상황을 보면 수긍이 간다. 모란봉악단이 공연을 취소하고 귀국한지 3일 후인 12월 15일 지도자는 수소탄 실험준비와 관련한 노동당 군수공업부 보고서 표지에 “…2016년의 장엄한 서막을 첫 수소탄의 장쾌한 폭음으로 열어제낌으로써 온 세계가 주체의 핵강국, 사회주의 조선, 위대한 조선노동당을 우러러보게 하라! 김정은 2015.12.15”라는 친필을 남겼다. 모란봉악단의 중국 방문에서 분명 ‘수소탄’ 발언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외교적 수모를 겪었으니 수소탄의 장쾌한 폭음으로 모두 씻으라는 것이다. 2016년 1월 6일 수소탄시험이라고 주장하는 4차 핵실험은 그렇게 단행된 것이다.
집권 이후 4차례의 핵실험과 여러 형태의 ICBM 및 중단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끝에 북한 지도자는 2017년 11월 29일 ‘핵무력 대업 완성’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북한 핵무장은 중국의 국가이익을 해치는 악몽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조성된 화해무드 속에 시작된 북중 정상회담은 1년 반 사이 무려 다섯 차례나 있었다. 2018년 3월 중국이 집권 6년만에 북한 지도자의 첫 베이징 방문에 동의한 것은 ‘핵무력 대업 완성’ 선언에 따른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해서가 아니다. 중국은 미중 전략 경쟁 속에서 거세지는 미국의 압박에 대응해 미국의 전략적 힘을 소진시키고 역량을 분산시키는 데서 북한의 역할을 찾은 듯하다. 더욱이 2018년 4월 노동당 제7기 3차 전원회의에서 핵미사일 모라토리엄이 선언된 만큼 당분간 핵무기 고도화와 핵능력 증강에 대한 우려도 없을 것으로 보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한 것으로 본다.
그러한 중국의 기대는 2022년 북한이 2018년의 모라토리엄을 깨면서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2022년 3월과 11월 화성-17형 ICBM발사와 12월 핵탄두의 기하급수적 증대 발언에 이어 2023년 7월 화성-18형 ICBM발사와 핵능력 확대정책이 나오자 중국의 불만은 커져갔다. 그 불만이 첫번째로 확인된 것이 2023년 7월 소위 ‘전승절’ 70주기 행사였다. 2023년 4월 한미정상회담에서 날로 거세지는 북한의 핵도발에 대한 대응으로 ‘워싱턴선언’이 채택되고 한미일 군사협력이 강화되자 북한은 북중러 군사협력으로 맞서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2023년 ‘7.27 전승’ 70주기 행사에 중국과 러시아 국방장관의 방북을 요청한 듯하다. 행사 하이라이트인 열병식 주석단에 북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좌우에 중러 국방장관들이 서 있는 장면을 통해 북중러의 군사협력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그에 러시아는 쇼이구 국방장관을 파견하였으나 중국은 리홍중 당 정치국 위원 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보냈다. 그에 대한 북한 지도자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7월 26일 북한 지도자는 쇼이구 국방장관을 노동당 본부청사로 불러 회담을 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받고 서로의 선물을 주고받은 데 이어 함께 무장장비전시회장을 참관하였다. 그러나 중국 리홍중 전인대 부위원장은 외빈이 함께 하는 7.27공식 행사 이전에 따로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시진핑 주석의 친서 전달은 첫 공식행사인 경축대공연장에 들어가는 문전에서 북한 고위 간부들과 러시아 국방장관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졌다. 사실상 시진핑 주석을 욕보인 그 장면은 중국이 두고두고 되새길 치욕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 대표단이 중국 대표단보다 하루 먼저 도착했기에 의전에서 시간차가 생겼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7월 25일 밤에 도착해 26일 공식일정에 들어갔기에 26일 도착한 중국 대표단과의 공식일정 시작은 몇 시간밖에 차이 안 난다. 중국에 대한 불만의 표시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이 되지 않는다.
북중 사이 갈등은 지난해 7월 북한 서북부를 강타한 홍수 피해에도 어려 있다. 당시 양강도, 자강도의 일부 압록강변과 평안북도 의주군과 신의주시 등 강 하류지역에 거대한 홍수가 들이닥쳤다. 7월 28일 북한 지도자는 분노가 어린 비장한 모습으로 고무단정을 타고 수몰지역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8월 8일과 9일 이틀 간에 또 다시 수해복구현장을 찾아 수재민들 앞에서 연설하며 재해방지 조치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지금의 상태로는 압록강으로 방류되는 물의 량이 늘어나는데 따라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데 이런 고질적인 취약성을 이번 기회에 결정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압록강 하류 지역인 의주군과 신의주시에서 큰물피해위험성의 근원자체를 완전히 들어내야 합니다.”(노동신문 2024.8.10자)
이것은 홍수 원인이 댐방류로 인한 수량 증가에 있으며 북한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했다는 점에서 가해자는 압록강 대방인 중국측이라는 의미다. 물론 중국이 북한에 홍수피해를 유발하기 위해 갑자기 댐방류를 강행했거나 북한측보다 높은 방제벽을 설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사전 통보로 방류에 미리 대비하도록 하거나 하류 지역 방제 능력을 고려하여 방류속도를 조절하는 등의 하천 공동관리를 위한 쌍방 간의 의사소통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지난해 압록강 홍수 피해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북중 관계의 현실을 다시금 보여준 것이다.
지금 중국은 북핵 딜레마에 빠져 있다. 북한 지도자가 거듭 천명해온 것처럼, 북한은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핵을 가진 북한은 중국에 최대 악몽이다. 냉전 시대 공산주의운동 내의 이념 논쟁 속에서 북한은 ‘자주’의 미명 하에 중소 등거리 외교로 이익은 챙기면서 중국에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탈냉전 시대에는 핵개발과 대미외교로 중국을 괴롭히고 견제하였다. 그런 북한이 이제는 핵을 가졌으니 중국과 맞먹으려 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난 9.3 베이징 이벤트는 그런 북한의 자신감을 확인해주기에 충분하다.
그렇다고 북핵을 제거하기 위해 국제사회와 함께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오늘의 북한을 통제할 수 있는 현 정권이 한국이나 서방과 타협하며 중국 영향력에 도전하는 혁신정권보다는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북한 지도자의 핵무기 고도화와 핵능력 증강 정책이 현실화될수록 중국의 딜레마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중국의 선택이 궁금해진다. 끝.
● Issue Brief는 집필자의 견해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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