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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호] 장휘 전문연구원 - 워싱턴이 아시아 민족주의를 보는 두 시각

제127호


장 휘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원)


워싱턴이 아시아 민족주의를 보는 두 시각


2015년 12월 28일 소위 한일 위안부 합의는 누구도 그런 합의가 만들어질지 예상 못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발표되었다. 한일 양국 외무부 장관은 서울과 도쿄에서 각각 위안부 합의에 대한 발표문을 낭독했다. 이 발표문은 발표문을 기점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양국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합의를 했으며, 일본은 10억 엔의 기금을 조성해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한국 정부는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 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관련단체와 협의하여 해결하며, 양국정부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더 이상 이에 대해 상호 비난 및 비판을 자제하겠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었다.2013년 취임 후 줄곧 위안부 문제에 강경입장을 취하며 2015년 11월 취임 이후 처음으로 아베 수상과 정상회담을 가질 때까지 한 차례의 정상회담 없이, APEC회의 등 국제회의장에서 아베 수상과 시선마저 피하던 박근혜 전대통령의 행보를 생각하면 이러한 급작스러운 합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궁금증을 자아내기 충분했다.1)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합의의 배경에 일본을 중심으로 부상하는 중국에 대항하는

한미일 동맹의 기초를 다지려는 미국의 태평양 정책이 있다고 주장한다.2)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강경책은 위안부를 성노예라고 부르도록 지시한 당시 미국무부장관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의 발언3)이나, 인권을 중시하는 오바마 행정부의 전반적 기조에 자신감을 얻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국무부 동아시아 차관보 웬디 셔먼(Wendy Sherman)은 2015년 2월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컨퍼런스 기조연설에서 민족주의 감정은 과거의 적을 비방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받으려는 정치인에 의해 어디서든 착취당할 수 있으나 이는 발전보다 관계 경색을 가져온다는 발언을 한다.4) 워싱턴은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 경색이 미국의 아시아 안보에 장애가 될 것으로 인식하고 한국 정부의 강경 노선을 견제했을 뿐 아니라 양국이 급작스런 합의에 이르도록 종용했다. 즉, 미국의 아태 안보 정책결정자들은 전통적으로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 태평양 질서를 유지 확장하는 것이 미국의 안보에 도움이 되고, 민족주의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는 한국 정부의 움직임은 그러한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전략에 장애를 가져온다고 본 것이다.


미국이 건국 이후 서부로 영토를 확장해 나아가며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 국가들과 접촉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매슈 페리(Matthew Perry)제독, 앨프리드 머핸(Alfred Mahan),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등 미국의 초기 아시아 태평양 질서를 기획했던 전략가들은 일본이 그들 관점에서 여전히 전근대적인 대륙의 슬라브인들과 중국인들을 길들이는데 도움이 될 모델 국가라고 보았다.5) 예를 들면 해군의 전략가로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모두의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던 머핸은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와 서구제도 도입이 일본을 미국이 추진하는 근대 해양국가들의 동맹의 일환으로 편입시켜 이 지역에 건강한 세력 균형을 유지시켜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역시 미일관계를 노련하게 관리함으로 미래의 아시아와 서구 사이의 큰 문명 충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믿음에 기반해 루스벨트는 일본이 서구와는 인종적 종교적으로 다르지만 러시아의 전제주의보다는 미국의 체제와 더가깝다고 믿었고 따라서 일본을 존중하며 평등하게 다루어 일본이 서구 규범에 더욱 수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건국의 아버지들이 구상했던 자유 제국을 태평양에 확장해 민주적 가치와 시장질서를 공유하는 동맹을 건설하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일찍 근대화를 이루어 서구 제도를 도입했던 일본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의 자격을 갖게 되었다. 정파나 입장에 따라 부침은 있었으나, 이러한 시각은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정책에 있어서 여전히 많은 정책결정자들과 정책 분석가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다.


193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로의 전진도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이러한 시각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1930-40년대 미국의 국무장관과 전쟁장관을 거치며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은 1930년대 초 후버 대통령 아래에서 국무장관을 하며 미국 극동 정책을 총괄했다.6) 법률가 출신 스팀슨은 오랜 외교관 경험을 통해 일본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일본의 군국주의로의 발전을 보면서도 일본 내 서구에 우호적인 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 같은 사람들을 지원한다면 민족주의 선동가들에 놀아나지 않고 일본을 우호적인 세력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일본은 급속하게 우경화하며 만주에서 영토를 확장하며 결국 중일전쟁까지 일으켜 미국의 문호개방정책과 워싱턴체제는 결국 무너지게 되었다. 점차 강력해진 일본군은 만주와 동남아를 빠르게 잠식하며 과거 서구 식민지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30년대 미국의 일본에 대한 오판은 일본 군국주의 확산과 미국의 태평양 전쟁 참전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두 발의 핵폭탄으로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 종지부

를 찍었지만, 당시 새롭게 부상하던 소련의 확산을 봉쇄정책을 통해 저지해야 한다는 조지 캐넌(George F. Kennan)의 메모 이후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신생 국가들의 민족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미국 아태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또 다른 수수께끼가 되었다.7) 매카시즘으로 절정을 이루는 냉전적 시각에 사로잡혀 당시 미국 국무부는 아시아의 신생 국가들의 민족주의가 공산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의심을 전제로 아시아의 민족주의를 위험하고 인종적이며 공산주의 운동으로 간주하며 견제를 했다. 이러한 미국의 강경한 행동은 윌슨주의를 환영하며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근거로 윌슨주의를 통해 서구와 연대하는 것 역시 하나의 중요한 옵션이었던 아시아의 민족 지도자들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예를 들면, 1945년 8월 호찌민이 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을 선언하며 대서양 헌장과 미국의 건국 원칙에 호소하며 미국의 인정을 받기를 원했다. 미국은 당시 아시아 담당관들이 베트남 신탁통치와 독립 지지를 제안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고, 호찌민은 결국 1950년 소련과 중국 정부의 인정을 받으며 군사 지원을 확보했다. 베트남전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호찌민 민족주의 발단에 대한 근본적 오해로 인해 베트남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즉 아시아 민족주의 지도자들에 대한 미국의 비협조는 결국 이들이 실제로 공산주의 세력과 연합해 공산화를 가속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고 이는 미국이 오랫동안 빠져나

오지 못한 늪인 베트남 전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아시아 태평양에서 미국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그에 도전하는 세력을 허용하지 않는 전략은 장기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새롭게 아시아 태평양 지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미국의 강력한 힘에 대항할 중국이 부상하자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정책은 또 다시 실험대에 올랐다. 그러나 워싱턴 정책결정자들이 오랫동안 공유한 아시아 국가의 민족주의에 대한 이중적 시각은 미국이 큰 전쟁에 연루되게 만들기도 했다. 위안부 사례에서 보듯이 미국은 장기적인 아시아 태평양 안보 전략을최우선에 두고 어떠한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경계하는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아시아의 민족주의에 상이한 기준을 적용하면서 오히려 원래 목표였던 한미일 삼각 동맹의 기반을 다지는 것과는 먼 곳으로 오게 되었다. 이는 미국이 50년대 비동맹국가들이 반둥회의를 개최했을 때에도 적극적으로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를 조직하려는 시도를 통해 오히려 중립국들이 중국에 더 우호적인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었던 것과도 유사한 상황이다.8) 즉, 미국에 덜 우호적인 국가의 민족주의를 경계하며 우호적인 세력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미국의 더 우호적인 국가의 민족주의 혹은 우경화에는 눈을 감을 때 오히려 미국의 전략적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던 적이 많다.


최근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숨 가쁘게 변화하고 있다. 새롭게 건설되고 있는 동아시아 평화체제 속에서 미국이 취하는 입장에 따라 더욱 견고한 미국의 헤게모니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기회다.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오히려 미국의 초기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민주주의와 개방 시장의 가치를 공유하며 평화체제 구축을 추구하는 국가들과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공동으로 추구하는 것이 이 지역 헤게모니 도전자들은 가질 수 없는 매력으로 미국의 영향력을 확장시킬 것이다.


1) 대한민국 외교부 홈페이지 (http://www.mofa.go.kr/www/brd/m_4076/view.do?seq=357655)

2) 예를 들면, 손열, “위안부 합의의 국제정치,” 『국제정치논총』제58집 제 2호, (2018): pp.145-177.

3) “Clinton says 'comfort women' should be referred to as 'enforced sex slaves',” Japan Today (2012, July 11)

(https://japantoday.com/category/politics/clinton-says-comfort-women-should-be-referred-to-as-enforced-sex-slaves)

4) Simon Mundy, “US diplomat angers Seoul with comments on regional tension,” Financial

Times (Mar 2, 2015) (https://www.ft.com/content/9e78bf88-c0b8-11e4-9949-00144feab7de)

5) 이하 미국의 건국 초기 일본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는, 마이클 J. 그린, 장휘∙권나혜 옮김, 『신의 은총을 넘어서: 1783년 이후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대전략』 (서울: 아산정책연구원, 2018) 제1부 제1장을 보시오.

6) 이하 미국의 1930년대 일본에 대한 국무부의 입장과 태평양 전쟁의 발발에 대해서는, 마이클 J. 그린, 같은 책, 제2부 제5장을 보시오.

7) 이하 냉전 이후 신생국들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대응과 전략에 대한 분석에 대해서는 마이클 J. 그린, 같은 책, 제3부 제7장을 보시오.

8) 반둥회의에 대한 미국의 대응과 그 평가에 대해서는 마이클 J. 그린, 같은 책, pp.417-418을 보시오.


Issue Brief는 집필자의 견해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의 공식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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