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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호] 조진수 전문연구원 - 인민반 제도를 통해 본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주민의 일상생활


제175호


조진수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원)



인민반 제도를 통해 본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주민의 일상생활

     

 집단주의를 생명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서 모든 주민은 집단주의 강화를 위해 평생 조직생활을 해야 한다. 조직생활을 크게 둘로 나누면 정치조직 체계와 행정분류 체계가 있다. 정치조직은 조선로동당과 근로단체(청년동맹, 직업총동맹, 농업근로자동맹, 여성동맹)로 나뉘는데 당이 근로단체를 영도한다는 개념이다. 행정분류 조직으로 인민반이 있는데 당간부, 당원, 남녀노소 관계없이 전체 인구를 망라하는 말단 행정조직으로, 거주지가 속한 행정구역별로 나뉜다. 인민반은 보통 20-30세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족 구성원 모두 속한다. 그런데 주로 활동하는 주체는 가두여성(전업주부)이며 책임자는 인민반장이다. 인민반장은 인민반원들을 잘 이끌기 위해서 어느 정도 지식과 리더십이 있는 여성으로 선출한다. 인민반장과 인민반원들의 관계는 가까우면서 동시에 경계하는 이중적인 관계이다. 인민반장은 일주일에 한 번씩 보위부(국정원에 해당)에 보고하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그들은 드러난 보위부 밀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인민반에서는 일주일에 1회 이상 저녁에 회의하는데 각 세대에서 반드시 한 명은 참석해야 한다. 보통 가두여성이 참석하지만 참석하지 못할 경우 세대주(남편)나 자녀라도 참석해야 한다. 인민반 회의 예를 들면, 인민반장이 동사무소를 통해 국가에 분토를 500㎏내라는 과제를 받았을 때 한 집에서 얼마씩 내야하며 이것을 언제까지 어디에 운반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토론을 한다. 또한 쓰레기장을 치우기 위해 달구지를 불러야 하는데 달구지꾼들을 위한 술이나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각 세대별로 얼마씩 낼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토론하기도 한다.

 북한정권은 인민반 행정제도를 통해 주민들의 집단주의 문화를 강화하고 연대감을 형성하고자 했다. 또한 배급제, 사회동원(노동력 동원)과 경제과제 부여, 통제 및 감시를 실시했다. 북한이탈주민들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 이전 인민반 주요기능은 마을꾸리기나 위생사업(매일아침 마을청소), 배급받기, 공동체 생활을 통한 집단주의 강화이다. 인민반은 행정조직 체계이기 때문에 고난의 행군 이전에 국가사업을 위한 대중사회동원은 주로 정치조직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경제과제의 경우, 김정일이 1980년대에 가두여성과 은퇴자도 국가경제에 보탬이 되도록 가내수공업 생필품을 만들도록 지시한 후, 인민반에서 경제과제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인민반별로 군인들을 위해 벙어리장갑, 귀마개, 깔깔이 등을 만들어 지원했다. 인민군대지원물자를 포함한 다양한 가내수공업 제품을 ‘8.3 인민소비품’이라 불렀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라는 역사적 우발성은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다. 고난의 행군으로 인해 배급제로 대표되는 계획경제가 거의 붕괴하고 시장경제의 발달로 주민들의 경제활동이 국영경제(공식경제)와 사경제(私經濟, 비공식경제)로 이원화되었다. 김정일, 김정은 정권을 거치면서 계획경제는 여전히 정체상태인 반면 시장화 현상은 더욱 활발해짐에 따라 주민들의 경제활동 중심은 국영부문에서 사경제 부문으로 이동하는 추세이다(이우영 외     2024).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주민들의 기본적인 일상생활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난의 행군 이전과 마찬가지인 점은,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10년간 군 복무 후, 여자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을 배치 받으며, 여자들은 결혼하면 자연스럽게 직장을 그만두고 가두여성으로 지낸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 이후 달라진 점은, 남자들은 직장에서 월급이 매우 적거나 거의 없기 때문에 남편의 월급으로 생활이 불가능하므로 가두여성들이 종합시장(장마당)에서 돈을 벌게 되었다. 국가경제에 종사하지 않았던 가두여성들이 가정경제의 주체가 된 것이다. 가부장적인 북한 사회에서 가두여성들은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동시에 살림과 육아를 병행하고 조직생활인 여성동맹과 인민반 활동도 해야 한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남자들도 점차 직장에서 비상근직처럼 일하고 사경제 활동(주로 일용직)에 종사하는 추세이다. 매일 직장에 나가지 않는 대신 돈이나 물건을 상납하고 사경제 활동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 잠시 느슨해졌던 인민반 조직과 기능은 고난의 행군 이후 재정비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배급기능이 거의 사라진 대신 주민들의 자원수탈 기능이 강화된 것이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붕괴로 국가의 정상적인 투자와 회수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한정권은 인민반을 통해 주민들의 자원을 직접적으로 수탈하고 있다. 사회동원의 중심역할을 하던 공장과 기업소가 제 기능을 못하면서 동사무소와 인민반으로 사회동원과 과제수행이 옮겨진 것이다. 공장과 기업소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만성적인 전력부족, 배급제의 붕괴, 시장화의 확대로 인한 노동력 유출, 2016년 이후 국제사회의 대북 경제제재로 인한 무역급감을 들 수 있다(이우영 외 2024).

  한편, 고난의 행군 이후 서서히 뿌리내린 시장경제와 개인주의 문화는 주민들의 창조적 능력을 발전시켜서 과중한 경제과제나 사회동원을 시장경제원리로 효율적으로 해결하도록 만들었다. 인민반장과 반원들은 서로 윈윈하는 경제공동체가 되어 과제 수행을 하게 되었다. 매일아침 인민반원들이 하던 마을이나 공동화장실 청소의 경우, 인민반장은 반원들에게 돈을 걷어서 삵벌이(일용직)에게 청소를 시킨다. 예를 들면, 인민반장은 인민반원(세대주) 가운데 기업소에서 일하는 굴착기 운전원이 있다면 돈과 기름을 주고 마을에 쌓인 눈과 쓰레기를 치우게 한다. 인민반장은 협상을 통해 굴착기 운전원에게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일을 의뢰한다. 인민반 주체인 가두여성들은 하루하루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사경제 활동을 해야 하므로 과제를 수행할 시간이 없다. 과제할 시간에 사경제 활동을 하면 더 많은 수입이 생기기 때문에 과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두여성들은 생존하기 위해 인민반에 시장경제원리를 도입해서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바꾸어나갔다. ‘8.3 인민소비품’의 경우, 요즘은 인민반에서 거의 만들지 않고 장마당이나 ‘8.3 인민소비제품소’에서 물건을 사다가 다시 낸다. 혹은 돈이 필요한 세대에게 몰아서 만들게 하고 돈을 주기도 한다.

  고난의 행군 이후, 특히 김정은 시대에, 북한정권은 인민반에 과중한 경제과제를 부과하고 있다. 인민반별로 유휴자재수집(파철, 파동, 파지, 파유리, 빈병), 외화벌이과제(염소·토끼 등 가축 기르기, 누에고치 수집, 산나물·약초 채취) 등 다양한 경제과제를 수행하며, 물자지원(군대지원물자, 건설현장물자, 농촌지원물자)도 해야 한다. 건설현장물자는 마을 주변 공사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청년돌격대원들에게 안전모, 시멘트, 삽, 장갑, 철강재, 모래, 목재, 자갈 등의 물자를 지원하거나 음식을 지원하는 것이다. 농촌지원물자는 협동농장에 분토, 호미, 낫 등을 지원하는 것이다. 또한 세대별 사회동원도 가중되고 있는데, 농촌지원전투나 건설현장동원이 있다. 고난의 행군 이전에 건설현장동원의 주축은 청년돌격대였는데 고난의 행군 이후 인민반 가두여성들도 물자지원뿐만 아니라 돌, 자재를 운반하는 일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인민반의 마지막 기능은 주민들의 일상통제와 감시인데, 고난의 행군 이전부터 북한 보위부와 보안원(경찰관에 해당)은 주민들의 동향을 알기 위해서 인민반을 활용했다. 이를 위해 숙박검열을 하는데 이는 인민반장 입회하에 보안원이 인민반원들의 집에 들어가서 외부인이나 외래 불순영상물이나 밀수품이 있는지 검열하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반장이라면 불시에 검열을 해도 걸릴 것이 없는 안전한 집들을 보여줬다. 이러한 이유로 반원들은 인민반장에게 잘 보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인민반장은 인민반에서 발생하는 일에 대해 동사무소와 보안원에게 보고하고 기록을 남긴다. 보안원은 분주소장(파출소장에 해당)에게 보고하고 그 다음 인민보안서, 인민보안성, 중앙당까지 보고하는 체계이다.

  고난의 행군을 지나면서 시장화 현상이 활발해지고 북한정권의 사회통제가 약화되면서 북한 사회는 변화하게 됐다. 중국 접경지역인 혜산의 경우, 고난의 행군 이후 외부인이 없는 집이 드물기 때문에 숙박검열의 목적이 외부인 감시보다는 그 집이 어떤 밀수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지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보안원들은 숙박검열을 통해서 주민들에게 꾸준히 뇌물을 받을 수 있다. 말단 보안원은 뇌물을 받아서 서장, 부장에게 바쳐서 승진을 한다. 어느 정도 이런 순환시스템이 이루어지다가 동사무소의 보안원들이 교체가 된다. 그러면 그 인민반의 주민들은 다시 새로운 보안원에게 뇌물을 주면서 사회와 경제가 돌아가는 것이다. 불법이 저질러질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서로서로 뇌물로 입막음한다. 모순적 삶이 누적되면서, 북한이탈주민들은 현재 북한 사회가 비법(非法, 無法)사회가 되었다고들 말한다. 북한은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 경제시스템를 유지하는 가운데 사유재산과 시장경제활동을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있는데, 공정한 시장경쟁을 보장해 줄 포용적인 법과 제도가 자리 잡을 수 없는 모순적 구조 속에서 사회와 시장은 불법과 뇌물로 돌아가고 있다.

  고난의 행군 이후 인민반의 기능은 변화했다. 그 속에서 북한주민들은 사경제 활동과 네트워크를 통해 자원과 생존 전략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시장경제제도가 서서히 자리 잡았다. 북한주민들은 고난의 행군 이후 점차 개인주의적이고 시장적인 주체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제도적 표류에 따른 비효율성과 고통은 북한주민의 일상생활에서 비합리적인 비용을 가중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 Issue Brief는 집필자의 견해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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