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호
김 숭 배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원)
“전후”와 “해방”의 한일관계, 그리고 국제정치학
1945년을 보편적인 기준으로 하여 “전후 한일관계”라는 견해가 있다. 인류사에서 전쟁은 항상 큰 문제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식민지 문제를 평화의 반대개념으로 파악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거에 수차례에 걸쳐 충돌한 독일-프랑스 간의 집단적 무력 전쟁과 그 전쟁 이후는 한일 관계와는 다르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으로 패전한 일본의 전후와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전후는 다르다. 무엇보다도 일본과 한국 간에는 1945년까지 이어진 아시아태평양 전쟁 중의 식민지 문제가 있고, 이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다르다. 일본과 한국의 역사에는 “전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종차”(種差)가 존재하고 있다.
"전후“라는 용어는 일본의 시대구분과 관념의 변환점으로 큰 의미가 있다. 비록 일본 헌법이 공포된 1946년 11월 3일이 메이지 천황의 탄생일이고, 당시의 정치지도자들이 그것을 의식해서 공포일을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일본이 기지 국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 전후 일본이 직접 전쟁에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일본은 자신을 "평화 국가"로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21세기에 "전후 레짐"을 제창하는 것이 "헌법을 정점으로 한 행정 시스템, 교육, 경제, 고용, 국가와 지방의 관계, 외교・안전보장 등의 기본적인 틀"에서 "21세기가 된 지금,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들의 힘으로 현재에 맞는 새로운 구조로 바꿔 나아가야" 한다면, 일본의 1945년 직후의 역사는 지금과 직결되는 것이다.
1945년 11월,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 총리를 중심으로 전쟁조사회가 발족하였다. 자율적으로 전쟁의 원인과 실정을 조사하는 것은 "평화적이고, 행복하며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새로운 일본의 건설"에 필요했다. 이를 위해 조사회는 중일전쟁 및 태평양 전쟁만이 아닌, 제1차 세계대전, 러일전쟁, 메이지 유신 등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거기에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은 없었다. 이러한 인식은 일본 특유의 것이 아니다. 1946년부터 시작된 도쿄 재판은 1928년부터 45년까지의 일본인 지도자들의 불법행위를 심리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재판에서는 식민지 문제가 빠져있었기 때문에 리버럴한 일본인 연구자는 이 점을 지적해 왔다. 그러나 판결문을 잘 보면 식민지 문제가 빠져있었다기보다 연합국은 1928년 이전에 일본이 취득한 권리로, 1910년의 "한국병합"을 인정하고 있었다.
한편 한국에서 사용되는 "해방"은 "전후"와 같은 시간 축을 가지고 있다. 1945년 7월 26일, 연합국은 포츠담 선언을 제시했다. 일본이 이를 수락하지 않자 미국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본은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한 원자폭탄의 피해국이지만, 유일한 민족은 아니었다. 한반도나 대만, 그리고 중국 본토에 뿌리를 둔 민족도 역시 원자폭탄의 피해자였다. 8월 14일 오후 11시에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다. 다음날 쇼와 천황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대동아전쟁"의 종결을 선언했지만, 이 칙서의 일자는 8월 14일이었다. 15일 이후에도 일본군과 소련군의 전투는 계속되었고, 9월 2일에 일본이 항복문서를 조인하는 것으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많은 국가가 9월 2일을 대일승전기념일로 삼았는데, 일본에 있어서 8월 15일의 의미는 종전이자, 전후의 시작이기도 했다. 한편 한반도에서도 쇼와 천황의 성명은 "해방"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리고 3년 후인 1948년 8월 15일, 한국은 독립을 선언하고 12월 12일의 국제연합 결의 195호(Ⅲ)로 국제적인 승인을 얻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빠른 시기부터 일본에 대한 배상 청구가 논의되고 있었고, 1919년의 독일에 대한 가혹한 베르사유조약도 법적 근거로 참조되었다. 다만 일본의 대일 배상 요구는 "징벌"이나 "보복"이 아닌 "폭력"과 "탐욕"에 대한 "피해복구"이었다. 1949년, 한국의 "대일보상요구조서"에서는 "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일본의 한국 지배"를 기술하면서 식민지 시기를 말하고 있다. 또한 "중일전쟁 및 태평양 전쟁에서 기인한 인적 피해"를 기술하면서 전쟁으로 인한 피해성도 포함하고 있었다. 즉 그 요구에는 "식민지 책임"이나 "전쟁 책임"이 포함되어 있었다.그러나 1951년, 연합국과 일본 간의 "전쟁 상태"를 정식으로 종결시키고, 일본의 주권을 회복시켰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한국은 서명국 자격을 얻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냉전과 한국전쟁이라는 "열전" 속에서 아시아태평양 전쟁 후의 "전후 질서"를 형성했지만, 식민지 해방 후의 질서 형성에 관해서는 특별한 규정이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평화조약은 "전쟁과 그 후"에 주안을 뒀던 것이며, 패전국이 보유하고 있었던 식민지 분리 조항이 있다고 하더라고 "식민지 문제와 그 후"를 고려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 전문에 있듯이, 1948년에 유엔을 통해 주권이 인정된 한국과 1951년에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평화조약을 통해 주권을 회복한 일본은 국교를 맺었다. 이후, 양국은 과거에 대한 인식의 괴리를 조금씩 좁히면서 지금까지 전진해 왔다.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그리고 1998년의 "한일공동선언"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최근의 한일관계는 과거 문제가 여전히 크다는 것을 통감하게 한다. 그것은 양국이 상호보완성을 가지고 있었던 경제, 안보 영역까지 파급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처럼 국가 또한 명성이나 소원의 총체인 위신을 추구한다. 현재 한일관계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그 "실천론"을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정치지도자들 간의 신뢰 구축, 안보를 구축한 전략성의 확인, 문제에 대한 해결 우선순위 확립, 민간 단체교류의 계속성 등이 모두 제의되고 있는 것처럼 상호이해와 자기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그 후에 해결법이 아니더라도 "국제정치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포괄적으로 말할 수가 있다.
첫째, 라틴어에서 나온 "합의는 지켜야 한다"라는 경구(警句)는 현대의 주권국가 간의 약속이 개인 간의 약속 이상으로 의미가 있으며, 국제법에 의해서도 효력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조약법에 관한 빈 조약"의 전문에서도 규정되고 있다.
둘째, 로마제국에서 독립한 스위스의 법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바텔(Emer de Vattel、1714-1767)은 저명한『국제법(Le Droit des Gens)』에서,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정의의 원칙보다도 양보와 타협을 통해 주장들 간의 정합성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셋째, 국제정치학에서 "화해"의 이론은 화해 방식에 대한 고찰에서 체계화되어 왔다. 조약 등을 통한 제도적 화해, 배상을 통한 물리적 화해, 그리고 추도와 기념식전 등을 통한 관념적 화해라는 삼중구조는 국가 간의 안정성을 가져온다.
첫째부터 셋째까지의 국제정치학적인 시점은 주로 "전쟁과 평화"라는 테제에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와 평화"의 관점이 요구되는 한일 간의 관계성은 국제정치학의 발전성을 필요로 한다. 머지않은 미래에서 주권국가 간에 전쟁이 이루어질 경우, 평화조약을 통해 전쟁을 정식으로 종결시키는 것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식민지 지배"가 성립할 일은 없다. 전쟁과 식민지는 모두 잔혹하지만,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전쟁에 대한 위기감에 비해, 식민지 문제는 일어날 수 없는 과거의 문제로 잔존한다. 일본과 한국의 인식 차이는 과거에 대한 해석과 인식에서 파생하지만, "한일 관계의 국제정치학"이 있다고 한다면 "전쟁과 평화, 그리고 식민지"라는 테제를 양국사뿐만이 아닌, 세계사에 제기시켜야 할 것이다.
● Issue Brief는 집필자의 견해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Comments